본문 바로가기

글/marvel

힐타샤 임무수행


"시계가 낡았네."


힐은 아까 전부터 자신의 뒤에서 화면을 슬쩍 넘겨다보며 어슬렁거리는 로마노프가 신경이 쓰였다. 소매 안으로 들어가 있는 시계는 언제 또 본 건지. 다들 임무를 준비하느라 바쁜 와중인데도 로마노프만은 그 흐름에서 빠져나와 있는 것 같았다. 원래부터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인 건 알았지만 임무 시작 직전인데도 이렇게 여유로울 줄은 몰랐다. 사실 그녀와 이렇게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그렇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우선시해야 할 것은 임무였다.


"로마노프 요원, 곧 임무 시작이라고 들었습니다. 여기 있어도 괜찮은 건가요."


"어머 그래? 그럼 그만 가야지."


그녀가 힐의 어깨를 두어 번 털어주고는 상황실을 나섰다. 힐은 그녀가 나간 문을 힐끗 보고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오래된 시계에 괜히 손이 간다. 블랙 위도우라면 이번 임무는 간단하게 처리할 것이다. 



-


물론 힐은 그 과정에서 어떤 잡담이 오고 가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둘은 평소같았다면 서로 무전을 주고받으며 일을 진행할 필요가 없었다. 그건 힐이 하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안타깝게도 이번 일에 참여한 요원의 수 자체가 무척 적었고 그 안에 힐 또한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녀가 모든 이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는 모양이 되었다. 덕분에 힐은 뜻하지 않게 블랙 위도우와의 사담을 무전으로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힐 당신은 사귀는 사람 있어?"


주로 이런 내용으로다가. 


"...임무에 집중하죠."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이것저것 지시사항을 알려주고는 있었지만 이런 말이 무전을 통해 들어올 때마다 잠깐씩 멈칫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인물들의 얼굴과 쉴드가 찾고 있는 인물 데이터베이스를 매칭시키는 와중에도 그녀는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장난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멀티태스킹 몰라? 힐은 있을 것도 같은데."


무전기 너머로 둔탁한 타격음과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건 느껴졌지만 숨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멀티태스킹이네 정말. 힐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자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챈다.


"그 웃음은 있다는 의민가?"


"아뇨. 지금 막 매칭되는 인물을 찾았습니다. 그쪽 단말기로 데이터를 전송했어요."


그 이후로 쓰잘데기 없는 사담을 두 세 번 주고받은 후 목표물을 확보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복귀하라는 지시를 내린 힐은 숨을 내쉬며 뻣뻣했던 자세를 조금 풀었다. 작은 헤드셋 안에서 수고했다는 인사들을 주고받는다. 


"수고했어, 힐."


"당신도요."


긴장이 풀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니 그쪽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힐은 임무 수행중에 나눴던 의미없는 대화들이 의외로 재밌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눈치챘을까 생각해 보았다. 힐이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상하게 뜸을 들이는 로마노프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힐은 희미하게 뭔가가 삐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힐은 자신이 눈치챘을 정도면 그녀는 진작에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몸을 일으키며 급하게 알리려 했다.


"조심해요!"


힐과 미리 약속이라도 해둔 듯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커다란 폭발음이 귀를 꿰뚫고 들어왔다. 귀가 찢길 것 같은 소음에 한쪽 눈을 찡그린 힐은 황급히 모니터를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카메라도 함께 파손되었는지 노이즈만이 화면에 한가득이었다. 요란한  비명소리와 뭔가가 더 터지는 소리, 굴러가는 소리 등등 온갖 소리가 다 들려오는데 로마노프의 목소리만이 들리지 않았다. 저보다 먼저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었고 힐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로마노프? 제 목소리 들려요?"


차분하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다급해질 수 밖에 없었다. 힐은 망가진 화면만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것으로 안정을 찾으려 애썼다. 대답 좀 해요.


"당신의 그런 목소리는 또 처음 들어보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투다. 힐을 놀리는 것 같은 어투조차도 여전했다. 힐은 놀라움을 감추며 헤드셋을 꽂은 오른쪽 귀에 손을 가져갔다. 설명을 들어보니 침투했던 시설의 일당들 중 살아남은 몇몇이 폭탄을 설치하고 기습을 시도한 모양이었다. 블랙 위도우의 빠른 대처로 피해는 많이 줄인 것 같았지만 부상당한 이들이 많다고 했다. 

부상자들은 신속히 병원으로 옮겨졌고, 잔당들은 폭탄이 터진 직후 요원들에 의해서 처리되었다. 로마노프는 현장에 남아 뒷처리를 지시하고 있었다. 현장의 부산한 소리들을 여과없이 듣는 와중에 로마노프의 목소리가 그 모든 잡음들을 뚫고 들어왔다.


"그래서 아까 하려던 말 말인데, 내일 시간 어때? 괜찮은 시계점을 알고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