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넛 2014. 3. 5. 12:40

안나안나..인 것인가??

 

안나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은 한스와 그녀의 언니 엘사, 그리고 그가 휘두르는 검을 막으려 내미는 자신의 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익숙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들뜬 모습의 아렌델 사람들과 항구로 들어오는 수많은 배들, 그리고 열린 성문.


뭐지?


분명 자신은 몸 속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냉기에 떨며 죽어가고 있었다. 지금은그때보다는 나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꿈을 꿨나? 하지만 머리칼은 그때처럼 하얗게 센 상태였다. 그렇게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해 보려 머리를 굴리는데, 낯설면서도 항상 들어왔던 것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다.


안나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찾았다. 많은 인파들 속에서도 자기 자신은 생각보다 쉽게 눈에 들어왔다. 대관식 날, 드디어 성문을 연다는 사실에 들뜬 안나가 잔뜩 들떠서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백발의 안나는 그런 안나를 보며 그 때 당시의 기분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저 때는 정말 기대에 가득 찼었는데.


그리고는―


한스의 말과 부딪쳤었다. 한스의 모습을 보자 잊고 있었던 화가 다시 치밀어 올라왔다. 저 때의 자신은 멍청하게도 멀쩡한 겉모습에 속아넘어갔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넋이 나가서는 멍하니 있다가 헛소리나 해대고. 그런 자신이 한심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안나니까. 멍청한 얼굴로 한스와 대화를 나눴겠거니 했는데, 생각보다 설레는 표정으로 나는 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내 모습이 저랬었나.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나는 성으로 향했다. 곧 대관식이 시작될 터였다.

 


안나는 이것을 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람들은 저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보인다면 지금 대관식을 치르는 장소에 안나 공주가 둘이 있는 셈인데, 그 광경을 보고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리 없었다.

과거의 자신은 대관식에 참석한 한스에게 빠져서 엘사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다시 보니 장갑을 벗으며 덜덜 떨고 있는 손과 불안한 표정이 보였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엘사가 자신을 드러내기 전에 눈치를 챘었다면.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하지만 이런 가정은 의미가 없었다. 과거의 멍청한 나를 탓하는 것도 힘들었다.

가장 즐거운 순간은 파티가 한창일 때였다. 엘사가 말을 걸어줘서 어색했던 사이는 약간 풀리는 듯했다. 보고만 있을 뿐이었는데도 따스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다정하게 걸어오는 말과 칭찬, 그리고 미소. 나는 무척 당황했었다. 어색하게 있었던 당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낀 건 잠시였다. 둘이 함께 놀고, 놀리고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행복했다. 그 순간이 가장 짧은 순간이었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저 멍청이!


안나는 매일 이랬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말에 안 된다고 단호히 대답하는 엘사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훌쩍이며 자리

를 뜨는 자신도. 가만히 있었으면 한스와 다시 마주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지만 어떤 식으로든 다시 만났을 것이다.

안나는 한스와 다시 마주친 자신을 따라갔다. 둘은 춤추고, 서로 이야기하고―자신이 일방적으로 얘기했던가?―, 노래를 부르며 청혼을 했고, 청혼을 받아들였다. 3자가 되어서 이 모든 것들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한스는 모든 사실을 안 지금의 제가 봐도 매력적인 사람이기는 했다. 둘은 정말로 사랑스럽게 노래를 불렀다. 나는 자신이 그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았다.


, 안나. 너는 어쩜 그렇게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하니! 할 수만 있다면 저 둘의 사이에 들어가 자신의 손을 잡고 나오고 싶었다. 더 멍청한 짓을 저지르기 전에.


해볼까?


안나는 성으로 달려가는 둘을 쫓았다. 그리고 한스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낚아챘다.안나의 손은 너무나도 손쉽게 잡혔다. 그리고 그 손을 잡는 순간 과거의 안나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동시에 약간의 냉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구야, 너는?”


자신과 똑 닮은 얼굴에 머리색만 다른 사람.


-나는 안나야.

나도 안나인데. 나랑 똑같이 생겼네? 머리색은 다르지만…”


안나는 생각에 잠겼다. 하얀 머리를 가진 안나는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할지 생각했다.


신기하네! 나랑 닮은데다 이름도 똑같은 사람이 있다니!”


웃음이 나왔다. 나는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안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잠깐 짓더니 나에게 잡힌 손을 내려다 보았다. 한스는 어느 새 사라져 있었다.


근데 왜 잡은 거야? 난 얼른 언니에게 약혼 사실을 알려야 한다구.”


지금의 나를 잡으면, 모든 일은 다 없었던 게 될까? 꿈이어도 좋으니 언니가 떠나지 않았으면.

나는 나를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일 나와는 달리, 나는 기뻐서 상기된 얼굴로 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꺼내기가 힘들다.


-정말로 한스 왕자를 사랑해?

당연하지! 진정한 사랑인걸!”

-진정한 사랑이 어떤 건지 알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진정한 사랑이지!”


안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 다짜고짜 물어오는 질문에도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너무나도 확신에 찬 태도에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의 나는 누가 어떤 말을 해도 잘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고대하던 성문이 열렸고, 기다려왔던 진정한 사랑―이라고 느껴지는―을 만났으니 당연했다. 사실대로 말해도 믿지 않겠지. 믿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녀를 언니에게 보낼 수도 없었다.


-나랑 조금만 더 같이 있자.


안나는 자신에게 애원하듯 손을 꼭 쥐고 말했다. 사랑에 빠져 있는 그녀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이 풀린 안나는 그대로 풀밭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손을 잡은 이후로 추위가 점점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따뜻한 여름 날씨인데도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안나는 그런 자신을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며 옆에 앉았다.


괜찮아? 그렇게 옷을 따뜻하게 입고 있는데도 추워 보여.”


안나는 자신이 입은 옷을 내려다 보았다. 대관식을 위해 맞춘 드레스는 추위에 떠는 사람을 따뜻하게 해줄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떨고 있는 안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이런 걸론 별로 도움이 안 되겠지만…”


안나는 여전히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안나의 포옹에 약간의 따스함을 느끼고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성으로 갈까? 거긴 여기보다 더 따뜻할 거야.”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잠깐 시간을 연장하는 건 소용없었다. 몸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꿈일 텐데도 감각이 너무 생생하다.


-엘사를 너무 미워하진 말아줘.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제대로 전해졌을까? 앞으로 있을 일들을 말해주었어야 했나. 안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곧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쓸어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멍청한 건 나 자신인데.


안나? 몸이 너무 차가워.”


그녀의 몸은 너무 따뜻했다.

안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팔에 기대어 있는 안나를 보고 있었다. 잠들기 전처럼 시야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여기서 잠들면 자신이 원래 있었던 장소로 돌아가게 되리란 걸 직감했다. 얼음 속에서 잠드는 건 두려웠지만 또 다른 꿈을 꾸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곁에 남아있는 안나의 반응이 두려웠다. 눈앞에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죽거나 사라지면 나는 굉장히 슬퍼할 테지. 꿈이라면 내가 깨는 순간 사라져버릴 것들이지만 꿈 속의 나는……


안나? 내 말 듣고 있어?”


내 두 뺨을 손으로 감싼 안나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나와 그녀의 이마가 꾹 맞닿았다 떨어졌다. 안나는 얼어붙은 내 이마의 차가운 감촉에 놀라고 있었다. 잡지 말았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나는 나의 어리석은 선택을 되돌리기 위해 그녀를 잡았지만 결국은 이도 저도 아니게 되었다. 차라리 그냥 아무런 접촉도 없는 상태로 지켜보기만 했다면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나와 만나서 짧은 대화를 나눈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멋대로 찾아와서 멋대로 떠나는 거라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내가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꿈 속에서는 행복한 결말이었으면 좋겠어 안나.


힘겹게 버티고 있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