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벅적한 술집 안은 담배 연기와 술 냄새로 가득했다. 이 오래된 술집은 세월이 지나도 뭔가를 새로 놓거나 오래된 것들을 치울 기미라고는 보이지도 않았다. 가게 구석에 놓인 낡은 피아노는 이 건물이 세워지면서 들여놓았다고 했는데 연주는커녕 몇 년 째 뚜껑이 열리는 일도 없었고 벽에 걸린 오래된 야수의 초상화는 벨이 열심히 관리하기는 했지만 점점 종이가 낡아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삐걱거리는 나무판자들 아래로는 제 역할을 다 하고 있지만 불안불안해 보이는 배관들이 자신들을 잊지 말라며 고개를 슬쩍 내밀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그냥 두는 건 딱히 그러지 않아도 단골들이 알아서 이 술집을 찾아오기 때문이리라. 그건 지금 이 술집에 앉아 있는 엘사와 안나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지만.
오늘도 언니 둘은 아이들을 벨네 선술집에 맡겨놓고 일을 나갔다.
엘사는 큰 엘사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이 계약을 맺고 파트너로 일하게 되기 전까지 안나는 항상 자신을 데리고 일을 나갔었다. 하지만 이제는 비행기에 자리가 없어 항상 떼어놓고 다닌다. 이제 겨우 두 번째기는 하지만 그 다음도 그 다음도 계속 그럴 것이라고 엘사는 확신했다.
안나는 유명한 파일럿이었다. 실력으로도 유명했지만 실력이 아니어도 사람들의 입을 타고 도는 소문의 절반 정도는 가뿐하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대담한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는 했는데 그래서 같이 일하지 않기로 유명한 엘사가 파트너 제의를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엘사는 큰 엘사가 제의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안나는 비행만 시작했다 하면 사고 한 둘쯤은 기본인 사람인데 도대체 왜? 둘이 계약을 맺었다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하자 의뢰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당연히 집에 있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엘사는 이런 결론도 나지 않는 쓸모 없는 생각들을 하며 테이블에 엎어진 채 작은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언니와 이름이 똑같은 작은 안나. 게다가 생김새도 똑 닮았다. 안나의 축소판을 보는 듯해서 기분이 묘했다.
엘사 혼자였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자신보다도 더 작은 꼬마 안나가 함께여서 더 신경이 쓰였다. 처음 만난 사이라 말을 걸기도 어색해서 언니들이 떠난 후 잠시간의 침묵이 있었지만 안나는 혼자서 노는 게 익숙한 모양인지 집에서 가지고 온 장난감 비행기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거라도 마시고 있을래? 지금이 한창 바쁜 때라 같이 못 놀아줘서 미안해! 둘이 좀 놀고 있어봐, 금방 올게.”
벨이 가져다 준 커다란 잔에 담긴 우유를 마시던 엘사는 가게에 가득 찬 담배냄새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는 사람도 많으면서 매번 벨네 가게에 맡기고 가는 건 왠지 모르겠다. 아냐 그래도 오로라 언니네보다는 이쪽이 나을지도.
입가에 하얀 수염을 만들며 우유를 단번에 마신 안나는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엘사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엘사는 영문도 모른 채 따라 일어났다.
“우리 집으로 갈래?”
어차피 벨은 지금부터 새벽까지 바쁘게 일할테고, 여기 있어봤자 마음껏 놀기 힘들 건 뻔했다. 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나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비행기를 집어 들었다. 둘은 벨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가게 뒷문을 열고 나갔다. 시끌벅적한 소리들은 뒷문과 함께 닫혔다.
선술집 뒷문은 어두컴컴한 골목과 이어져 있었다. 엘사가 새까만 그림자에 놀라 잠시 주춤한 사이 안나가 먼저 앞으로 튀어나갔다. 낡은 상자들과 자루가 엉망으로 쌓여있어 일직선으로 그렇게 달리다가는… 저렇게 넘어졌었지. 엘사는 그 날의 아픔을 상기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신기하게도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던 안나는 예상과는 달리 잠깐 동안 아픈 무릎을 어루만지고는 벌떡 일어섰다. 엘사가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몰라서 안절부절하고 있는 사이 안나는 다 회복된 모양인지 금새 다시 뛰기 시작했다.
엘사는 안나를 놓칠까 싶어 장해물들을 조심스레 비껴가며 뒤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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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벨의 가게는 안나네가 지내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나는 매일 걸어서 여기로 놀러오곤 한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고양이와 벽에 붙은 녹슨 파이프, 무너져가는 울타리와 엉망진창인 쓰레기통들을 지나쳐 골목 밖으로 나오자 어두운 가로등 불빛과 밝은 달빛이 둘을 맞이했다.
큰 길로 나오자 마자 길 저편으로 달려간 안나는 길 한쪽으로 나 있는 수로와 길의 경계선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엘사는 위험해 보이는 모습에 불안해하며 안나의 옆에 따라 붙었다. 입으로 효과음을 내며 장난감 비행기를 높이 쳐 들고 달리는 모양새가 꽤 많이 해본 놀이 같았다. 생각보다 안정적으로 블록 위를 달리는 모습에 안심한 엘사는 종종걸음으로 안나를 뒤따라가려 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안나는 아래로 쑥 꺼졌다.
엘사의 반응속도는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둑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안나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눈으로 쿠션을 만들어냈다. 안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식할 새도 없이 눈 속에 푹 파묻혔다. 여름 하늘에 뜬 달빛을 받은 눈이 반짝였다.
그제야 엘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인식했다. 능력 쓰면 안 되는데. 언니도 남들 앞에서 능력은 쓰지 않는 게 좋다고 했었는데. 안나는 엘사가 생각하는 만큼 심각하게 능력에 대한 주의를 주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엘사가 받아들인 방향은 그러했다. 사실 안나의 말보다도 엘사 속에 자리잡은 두려움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는 했다. 지금은 안나 덕분에 이렇게 바깥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기는 하지만 한 때는 이상한 연구 시설에서 지냈었다. 깔끔하고 새하얀 방은 지금 지내는 집보다도 훨씬 넓고 좋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고 만날 수 있는 사람도 거의 매번 같은 사람이었다. 매번 자신의 능력으로 뭔가를 시험했었다. 관찰을 하고, 기록을 하고, 훈련도 했다. 그런 주제에 바깥 세상에 대한 온갖 이야기들은 책으로 접할 수 있게 해 놨었지.
시설에 있는 내내 생각했었다. 자신이 여기 이렇게 있는 이유는 능력 때문이라고. 능력만 없었다면 이 모든 상황들은 없었던 일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 봤다. 좀 오래 전의 일이긴 했지만 그 때문에 바깥에서 능력을 쓰는 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제하려고 하는 편이었다. 혹시라도 그들이 다시 찾아와서 자신을 데려갈까 싶어서.
눈 속에서 안나가 움직이는 모습을 본 엘사는 잡생각을 떨치려 애쓰며 둑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어쨌든 이번에 쓴 건 잘 한 일이었다.
눈더미 속에서 나온 안나의 온 몸에 눈가루가 잔뜩 묻어 있는 탓에 안나의 몸에서 빛이 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엘사는 안나의 몸을 털어주려 했지만 꼬마 안나는 그런 사소한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아이는 시선이 엘사의 손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안나의 눈 앞에서 흔들리던 엘사의 손이 덥썩 잡혔다. 아이는 손가락 끝을 뚫어지게 쳐다보면 뭐가 나오기라도 한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봤어?”
안나는 입을 벌린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하긴 보지 못했다면 그게 더 말이 안 된다. 뭐라고 둘러대지?
“언니도 마법 쓸 수 있어?”
순간 엘사는 제 귀를 의심했다. 소녀는 안나의 어깨를 붙잡으려던 손을 간신히 멈췄다.
“누구 또 마법을 쓰는 사람이 있어???”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엘사가 놀랄 차례였다. 시설 안에 자신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았었지만 실제로 능력을 가진 누군가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안나도 너만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고, 비슷한 친구들이 많다고 말은 해 줬지만 만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사실 자신과 비슷한 능력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조금 무섭기도 했다.
얼음과 눈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재미있고 쓸모 있었지만 동시에 위험했다. 의도치 않은 사고로 함께 놀아주던 안나를 다치게 한 후로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점점 더 커져왔다. 그녀는 괜찮다고 했지만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그 장면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능력은 멋지다고 생각하는 게 우습긴 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과 같다면 만나보고 싶었다.
“누구? 누군데?”
“엘사 언니.”
순간 자신과 그녀가 어딘가에서 복제된 인간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떠올렸다. 최근에 공상과학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인가 보다. 닮은 점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알았는데도 그녀에게 호감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안나는 놀란 모양이었지만 나쁜 쪽으로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는 자신의 언니 외에도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한편 기뻐하고 있었다.
“걱정 마. 비밀로 할께.”
아이는 엘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눈치챘다는 듯이 씩 웃었다.
“대신 우리끼리 놀 때는 마법 많이 보여주는 거다?”
비밀을 지키는 대가로 치자면 무척 쌌다. 대가라고 하기도 그런 것이, 엘사는 자신의 마법 사용을 즐기는 쪽이었다. 몇 번 사고를 치고 난 후라 얌전하게 지내고 있을 뿐이지 평소에는 굳이 마법이 아니더라도 이웃들 사이에서 장난꾸러기로 통하는 엘사였다.
“우리 언니는 남들 눈에 띄기 싫다면서 능력은 잘 안 쓴단 말야.”
그래도 눈 앞의 꼬마보다는 조금 더 큰 언니답게 여유있는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대강 털어냈는데도 옷에 남아 반짝거리는 눈 결정들을 붙인 채 안나는 엘사와 함께 둑 위로 기어올라갔다.
수로를 끼고 있는 길은 제대로 수리되지 않은 채 방치된 가로등이 많았지만 그 날은 달빛이 유독 환하게 길을 밝혀주고 있어 꼬마들끼리도 집을 찾아가는 데 별 지장은 없었다. 물론 이 늦은 시각에 꼬맹이 둘이서 위험한 길을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혼이 날 건 기정사실이었지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안나가 말한 대로 집은 정말 가까운 곳에 있었다. 1층을 개조해서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어 들어가자 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이런저런 기계 부품들과 모형 비행기들이었다. 작업실이라고 해서 정리되지 않은 어지러운 장소일 줄 알았는데 엘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깔끔했다. 그녀는 현직 정비사의 작업실을 조금 더 살펴보고 싶었지만 빨리 이층으로 올라가자며 재촉하는 안나의 손에 붙들려 눈에 잠깐 담은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안나는 이층에 들어서자마자 엘사 앞에서 펄쩍펄쩍 뛰며 마법을 써달라고 졸랐다. 엘사는 둘이 생활하는 공간에서 눈을 마구 뿌려도 되나 싶었지만 2층에서는 잘 수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물론 이건 안나의 의견일 뿐이었지만―안나의 말에 넘어가고 말았다. 소녀는 손을 둥글게 말아 빈 공간에 빛나는 눈 뭉치를 만들어 그다지 높지 않은 천장을 향해 던졌다.
“마법이다 마법!”
양 손을 번쩍 들고 천장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를 잡기 위해 펄쩍펄쩍 뛰는 안나를 보자 엘사도 신이 났다. 눈만 뿌리려고 했었는데, 뭐 어떠랴.
“잘 봐.”
장난스레 웃으며 발을 살짝 구르자 나무로 된 바닥에 하얗고 푸른 얼음이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얼음판이 된 바닥 위로 눈이 쌓여갔다.
동이 튼 후 집으로 돌아온 언니들이 눈과 얼음으로 난장판인 집 꼴을 보고 기겁하며 두 꼬마를 찾는 건 몇 시간 후의 일이었다.